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자파힛 제국 (문단 편집) === 본토 행정 === {{{#!wiki style="float:center;text-align:center" [[파일:majapahit_provinces.png|width=1050]]}}} 마자파힛의 지배 지역은 자바 중동부의 본토(나가라 아궁Nagara Agung)와 기타 지역의 속령(이하 절에서 설명)으로 나뉘었다. 마자파힛의 본토 행정 체계는 기본적으로 마자파힛이 계승한 싱하사리의 행정 체계와 대동소이했다. 본토는 공작 또는 지사(Bhra)가 다스리는 여러 지방으로 정연하게 분할되어 있었으며, 각 지방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몇 단계를 거쳐 하위 행정 구역으로 나뉘었다. 본토 지방을 다스리는 최고위 관직인 공작은 거의 라자사 왕가의 왕족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마자파힛 전성기인 14세기에는 수도 마자파힛을 중심으로 한 본토는 수도를 제외하고 12개의 지방으로 분할되었으며, 그 목록과 통치자의 명칭은 이하와 같다. 카후리판과 투마펠 등 핵심 지역의 공작으로 임명될 수 있는 것은 특히 최고위 왕족뿐이었는데, 가령 [[트리부와나]] 국왕은 재위(1328-1350)하기 전 1309년부터 1328년까지 카후리판 공작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본토(나가라 아궁) 및 만차나가라(동질적 속령) 외에, 누산타라(이질적 속령)에 대한 제국의 지배는 명목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나마도 수마트라, 보르네오 등을 제외하면[* 수마트라(제한적으로 말레이 반도도 포함)와 보르네오의 경우, 마자파힛 이전 시대부터 토착 세력 및 중국인, 아랍인, 인도인 관찰자들의 기록이 남아 있어 어느 정도 교차 검증이 가능하다. 보르네오 북부 [[브루나이|브루나이 술탄국]]의 경우, 중국과 상대적으로 인접한 까닭에 중국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는데, 1370년에는 [[명나라]] 사절이 브루나이에 도착했고, 중국인들은 당시 브루나이가 마자파힛 통제하에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와 같은 명과의 직접 접촉에 따라 송렴(宋濂) 등 당대 중국인들은 브루나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 브루나이 왕 마합모사(馬哈謨沙)도 명나라로 사신을 보냈다. 또한 1370년대부터는 브루나이가 [[명나라]]로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그러나 마자파힛의 종주권을 버렸는지는 다소 불명확하며, 당시 마자파힛과 브루나이의 정치적 관계를 상세히 설명하는 사료는 오늘날 찾아보기 어렵다. 14세기 말에는 명나라가 브루나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은 관계로 브루나이는 약 30년간 명목상으로만 명나라의 조공국으로 남았다가, [[정화(명나라)]]의 원정대가 해상 원정을 벌이면서 15세기 초에는 잠시 실질적인 명 제국의 간접 지배를 받았다. 이 과정은 명나라 측 기록에 의해 상당히 상세히 알 수 있다. 1408년 브루나이의 국왕 카르나(Maharaja Karna, 중국식 표기는 '마나야가나'麻那惹加那)가 신하들과 함께 명 제국의 수도 [[난징]]으로 와서 [[영락제]] 조정에 입조하고 난징에 머물던 사이 병에 걸려 사망했는데, 그 묘가 오늘날 '발니국왕묘'(浡泥国王墓)로 난징에 남아 있을 정도다. 그러나 영락제 사후 명의 대외 정책이 폐쇄적으로 바뀜에 따라 브루나이는 명나라로 보내는 조공을 끊고 독립적인 행보를 시작하였다.] 술라웨시, 말루쿠, 뉴기니 등 현대 인도네시아 동부 권역에 해당하는 [[누산타라]] 지역에서는 《[[나가라크르타가마]]》 등 자바의 기록 외에 이를 교차 검증할 당대 현지 사료가 매우 부족하다. 이 때문에 정말 마자파힛군의 원정과 복속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누산타라 체제 하에 있었던 지역의 범위는 어느 정도였는지, 또 얼마나 오래 누산타라 체제가 유지되었는지 등은 아직 섣불리 확정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 지역명 || 설명 || 통치자 || || 카후리판(Kahuripan) || 과거의 장갈라(Janggala) 지역, 오늘날의 시도아르조(Sidoarjo) || 카후리판 공(Bhre Kahuripan) || || 다하(Daha) || 과거 크디리 왕국의 중심부 || 다하 공(Bhre Daha) || || 투마펠(Tumapel) || 과거 싱하사리 왕국의 중심부 || 투마펠 공(Bhre Tumapel) || || 웡크르(Wengker) || 오늘날의 포노로고(Ponorogo) || 웡크르 공(Bhre Wengker) || || 마타훈(Matahun) || 오늘날의 보조느고로(Bojonegoro) || 마타훈 공(Bhre Matahun) || || 위라부미(Wirabhumi) || [[인도네시아/역사#s-7.3|블람방안(Blambangan) 지방]] || 위라부미 공(Bhre Wirabhumi) || || 파구한(Paguhan) || || 파구한 공(Bhre Paguhan) || || 카발란(Kabalan) || 오늘날의 말랑현(Kabupaten Malang)[* 오늘날의 블리타르현(Kabupaten Blitar) 일부도 포괄하였을 수 있음] || 카발란 공(Bhre Kabalan) || || 파와누안(Pawanuan) || || 파와누안 공(Bhre Pawanuan) || || 라슴(Lasem) || 오늘날의 라슴, 름방(Rembang) || 라슴 공(Bhre Lasem) || || 파장(Pajang) || 오늘날의 [[수라카르타]] 인근 || 파장 공(Bhre Pajang) || || 마타람(Mataram) || 오늘날의 [[욕야카르타]] 인근 || 마타람 공(Bhre Mataram) || 이상의 체제는 가끔 변화하기도 하였는데, 가령 1447년의 <윙운피투 비문>(Prasasti Wingun Pitu)에 따르면 당시 공작이 있는 본토의 지방은 자가라가(Jagaraga), 싱하푸라(Singhapura)[* 이 싱하푸라는 오늘날 [[싱가포르]] 지역에 해당하는 싱아푸라 왕국 지역이 아닌 자바 서부의 지명으로 보인다.], 클링(Keling) 등을 포함하여 14개가 있었다고 한다[* 완전한 목록은 다음과 같다. 카후리판, 다하, 투마펠, 웡크르, 마타훈, 위라부미, 카발란, 큼방즈나르(Kembang Jenar, 라슴), 파장, 자가라가, 클링, 클링가푸라(Kelinggapura), 싱하푸라, 탄중푸라(Tanjungpura).]. 이를 보면 15세기에 발리(자가라가) 등 일부 속령(만차나가라)이 본토(나가라 아궁)로 편입되었으며, 동화의 정도에 따라 본토와 속령의 경계는 유동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